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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충부(德充符)5-2 장자십사독

덕(德)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왜 정(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에게 정이 없다니? 이게 웬말이랍니까?
특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란 것이 원래는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자연에 어긋나며
결국 인위적인 것에 해당된다고 하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없는 분들께서는 한번 손을 드셔 보세요.
아마 아무도 손 드실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하긴 손을 드셔도 제가 볼 수는 없으니.. ^^)
물론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때문에 자기를 해칠 가능성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 대목에서 장자가 너무 무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갑자기 주된 논의에서 벗어나 견백론을 공격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견백론은 분별심 즉 오성(개념, 계산..)의 영역인데,
감성의 영역인 정(情)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견백론을 언급하는군요.
도대체 이 인간이 뭔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요?

이 부분이야말로 제가 장자를 읽을 때마다 그 해석이 크게 달라졌던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최근의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장자는 감정과 오성이 한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이 화를 내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감정의 작용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인간은 오성(분별)의 개입없이 화(情)를 내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감정과 오성이 한몸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못 생겼다고 욕을 했을 때 화가 난다면 이는 순수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못 생기거나 잘 생긴 것에 대한 오성적 판단을 전제로 한 감정입니다.
즉 그에 대한 판단체계가 달라지면 그러한 욕에 대해 화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가령, 인사를 할 때 상대방의 볼을 핥으며
인사를 해야 그 반가움의 정도가 높은 것으로 인식하는 종족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만약 이 종족이 지금의 한국에 와서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한다면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겠지요.
이렇게 똑같은 행위에 대해 한 종족은 반가워하고,
다른 종족은 불쾌해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대한 의미체계가 종족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 가지 판단체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지어 한 사회 내에서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각각 다른 자기 고유의 판단체계를 전제로 하여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판단체계에만 갇혀 지내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판단체계를 이해하는 사람일수록(즉 판단체계의 상대성을 체득한다면)
타인에 대한 포용력(德)이 클 것이고,
오로지 한 가지의 편협한 가치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포용의 한도가 작으며 결국 그로 인해 자신과 다른 것과 부딪힐 때마다 화를 낼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줘도 어떤 사람은 크게 화를 내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혹은 심지어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즉 이것(좋아하거나 싫어함 혹은 화를 내거나 기뻐함)은
자연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원초적인 차원에서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동물들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사람도 기본적으로는 동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기본적인 차원에서, 추우면 싫고 따뜻하면 좋고 배고프면 싫고 배부르면 좋을 것입니다.
장자가 혜자에게 "그것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닐세."라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원초적 감정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장자는 어떠한 차원에서 '좋아함과 싫어함'을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원초적인 차원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즉 추운 게 싫어도 따뜻해지면 곧 좋아지고, 배고픈 게 싫어도 배가 부르면 곧 좋아진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인간의 경우 상황이 바뀌어도 '좋아함과 싫어함'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렸던 경험이 있는 어떤 사람이
평생 동안 개를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의 문제는 그에게 개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도 않고
또한 더 이상 개를 싫어할 만한 '직접적인' 이유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개를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즉 오성적 판단이 한번 개입한 이후 그것이 고집스러운 판단체계로 고착화되어
편견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오성적 판단이 그에게 '개와 유사한 것'까지도 싫어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는 가령 개에 대한 그 사람의 혐오가 '개를 연상하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싫어함은 오성에 의해 좀더 체계화(일반화)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는 사람이 싫다!" 혹은 "나는 경상도 사람이 싫다!",
"나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싫다!" 등등.
그렇게 확장될 경우 그 사람은 살면서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무수한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고집스럽게 좋아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집착해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면서도 그것이 해가 되는 줄도 모릅니다.
가령 먹을 것이 아무리 좋아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데,
쓸데없이 엄청난 양의 먹을 것을 혼자 쌓아놓고 스스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이 굶는 것도 모르고,
그 먹을 것을 쌓는데 들이는 쓸데없는 노력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고갈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컨대 원초적 차원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넘어서
그 '좋아함과 싫어함'을 오성의 작용으로 머리 속에 지나치게 고착화시킬 때
자신을 해치고 결국 남까지 해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에 대해 장자는 인간 천연의 모습에 '좋아함과 싫어함에 대한 집착'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다'고 표현한 것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결국 좋아함과 싫어함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가
그 자체로 자연의 모습이며 가장 큰 덕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004년 1월 29일 秋水

덕충부(德充符)5-1 장자십사독

오늘 또 새 글을 올립니다.
그것도 장자십사독 덕충부편을 어제에 이어 연속으로 올립니다.
여행을 갔다 와서는 양생주편부터 새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덕충부편을 내일이나 모레 오전 중까지 마감하고자 합니다.

지금 생각해 두고 있는 순서는
덕충부-양생주-인간세-대종사-응제왕-제물론-소요유 순입니다만,
거의 아무렇게나 잡은 순서이기 때문에 순서의 변동은 언제든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단, 장자 철학의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소요유편은
일부러 맨 뒤에 배치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변덕이 생기기 전에는
가장 마지막에 소개할 예정입니다.

어제 잠깐 언급했듯이
오늘은 장자와 혜자의 대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그제와 어제 소개했던 부분의 바로 뒷부분이 아니고,
덕충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즉 그 중간에 있는 몇 부분은 빼버렸습니다.
왜 뺐냐고요?
기냥 지 맘대로 뺐습니다.
어차피 저를 통해 보시는 장자는 진짜 장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그 부분 뺐다고 해서 제 이야기에 큰 무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제 이야기가
장자의 본 뜻이니 잘못된 해석이니 하는 판단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억울하면 장자가 꿈에라도 나타나 뭐라고 투덜대겠지요.
하지만 뭐가 두렵습니까? 이미 뒈진 새낀디!

* 참고 사항 *
혜자(惠子)의 원래 이름은 혜시(惠施)입니다.
그는 장자와 같은 송나라 출신이며 장자의 주요 논적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칼 맑스의 저작에서 프루동이 틈만 나면 씹히듯이
혜자는 장자의 저작에서 허구헌날 씹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프루동이 맑스에게 맨날 씹혔다고 해서 만만한 철학자라고 치부하기 어렵듯이,
혜자 또한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맑스는 프루동을 경멸하고 결국 절연하고 말았지만,
혜자의 경우 죽는 날까지 장자와 친교를 맺었지요.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장자 외편인지 잡편 중에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혜시가 죽은 뒤에 장자가 매우 슬퍼했으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혜시는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로 분류되는 인물입니다.
명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논리학자들입니다.
이 학파의 업적 중 하나는
개념과 실재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지적해낸 공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명가는 흔히 그리스 철학자들 중 소피스트에 비견되나,
제가 보기엔 오히려 소피스트보다는 제논학파의 논법과 유사한 학파입니다.
실제로 명가에서 말한 내용과 제논학파에서 말한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가령, "화살을 쏘면 화살이 날아가지 않는다"를 비롯한 몇 가지 주장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제논학파는 수학적-논리적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생기는
모순을 지적한 것인데, 명가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명가의 주장 중에는
"천하의 중심은 연나라(당시 중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라) 북쪽,
그리고 월나라(당시 중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나라)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로 인해 현대 학자들은 명가에서 지구가 원형임을 알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명가 사람인 공손룡의 주장 중에는 그 유명한 "백마비마론"도 있지요.
이는 어떤 나라의 왕이 말을 타고 성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추상 같은 어명을 내렸는데,
공손룡이란 작자가 백마를 타고 성안에 들어간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문지기가 "말을 타고 성안에 들어갈 수 없다"며 길을 가로막자
공손룡은 "내가 탄 말은 백마다.
백마(특수 개념)와 말(일반 개념)은 똑같은 것이냐?"라고 반문했더니,
성문지기가 우물쭈물하다가 "그것은 서로 구별되므로 다른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공손룡이 "백마와 말이 다르므로 백마는 말이 아니다(白馬非馬).
따라서 나는 왕명을 어긴 것이 아니다."하며 성안으로 백마를 타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한편 혜시의 견백론(堅白論)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흰색의 굳은 돌이 있는데,
그것의 '흰' 성질은 시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굳은' 성질은 촉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통일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견백론을 반박하는 것은
견백론의 논리가 사물을 총체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고,
개념별로 쪼개어 인식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04년 1월 28일 秋水


<장자의 이야기(텍스트 p187-189): 감산의 장자풀이, 서광사.>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원래 정(情)이 없는 걸까?"
장자가 대답했다.
"그렇다네."
이에 혜시가 반문했다.
"사람으로서 정이 없다면 어찌 그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장자가 말했다.
"도가 사람에게 모습을 주고 하늘이 육신을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 아니겠는가?"
혜자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찌 정이 없겠나?"
이에 장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한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으로써 안으로 자기 몸을 해치지 않고 항상 자연에 따를 뿐 인위를 보태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네."
이에 혜자가 논박했다.
"인위를 보태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몸을 보전할 수 있겠나?"
장자가 말했다.
"도는 우리에게 모습을 주고 하늘은 육신을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으로 자기 몸을 해쳐서는 안 된다네. 지금 자네는 자기의 정신을 밖으로 치달리게 하고 자신의 에너지(精)를 메마르게 하면서, 나무에 기댄 채 헛소리를 하고 또한 거문고에 의지하여 시비 변론을 일삼는군. 하늘은 자네의 모습을 정성껏 만들어 주었거늘 자네는 어찌하여 견백론(堅白論)이란 궤변만 늘어 놓는가?"

덕충부(德充符)4-2 장자십사독

지난 주 금요일에 글을 올린다고 해놓고서는
이제서야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자를 좋아하지만,
장자가 한 말을 모두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그가 한 말이 아무리 좋아도 제 능력으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측면도 많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의 말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즉 수용하는 측면이 많기는 하나,
거부하는 측면 혹은 아직도 그에 대해 회의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 매료되면서도 참으로 그 말을
철저히 실천하기 어려운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포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포용은 장자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글 중(덕충부4-1)에서
"하늘은 만물을 골고루 덮어주고 땅은 만물을 빠짐없이 안고 있습니다(天無不覆地貿不載)."라는 구절은
그 자체로 자연의 모습이고 포용의 원형이며
동시에 덕의 극치를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가장 큰 덕은 자연의 덕이며
따라서 자연의 덕을 내면화시킨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덕을 지닌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저는 그 위대한 덕을 존숭하지만 이를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하늘이 제게 내린 형벌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 형벌이란 곧 분별심입니다.
분별심, 즉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서로 비교하는 마음은 포용에 대한 가장 큰 적입니다.
그 징그러운 녀석은 마치 숙명처럼 저를 쫓아다니는 괴물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말을 할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형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어쩌면 모든 인간이 그러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이브)가 '선악과'(선악에 대한 분별 능력을 상징)를 따먹은 것이
원죄가 되는 것 처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앞의 인용글에서 숙산무지가
"하늘이 내린 형벌인데 어찌 풀어줄 수 있겠습니가!"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공자를 겨낭한 말이 아니라(한겨레님 지적처럼)
인간의 운명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설령 몇몇 사람들이 그 형벌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대대로 그 형벌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 때의 운명이란 말은 결코 과장된 용어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유가(儒家)에서 도가(道家)나 묵가(墨家)를 비판할 때 자주 들먹이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친소관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차별이 없기를 바라느냐는 것이 바로 그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때 이미 인간의 분별심이 개입되게 마련입니다.
본문에 인용되기도 하였던 공자는 평생을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았던 인간입니다.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사람이지요.
분명 참으로 위대한 인간이었으나, 분별심을 초탈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공자는 분별심 자체가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장자는?
제 판단에 의하면, 장자는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결국 분별심을 초탈하여 '나와 남의 경계', '옳고 그름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점에서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이상형을 찾아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분별의 경계가 허물어진 순간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누구를 더 좋아하지도 않고 누구를 더 싫어하지도 않으며,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존경하지도 않고
발병신이나 죄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경멸하지도 않는 참으로 담담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는 확실히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하나,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태도가 인간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문제를 놓고 장자와 혜자가 나눈 대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동안 축하의 글을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4년 1월 27일 秋水

덕충부(德充符)4-1 장자십사독

해가 바뀌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글을 올립니다.
오랜만에 와보니 블로그의 기능이 추가되어 있군요.
무엇보다도 여러분들께서 방명록이나 답글란에 많은 글을 올려주신 것에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실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이리저리 신경을 써야 할 데가 많다보니 이처럼 지체가 되었네요.

준비할 일들은 아직도 좀 남았지만,
설 연휴와 신혼여행 기간에 글을 못 쓰고,
또 봄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일 때문에 자주 글을 못 쓰게 될 것 같아서
중간중간에 틈틈히
한편이라도 글을 올려놓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참고로, 프로그램 개편은 없습니다.
시간상의 차질만 제외하면 글은 모두 원래 계획대로 나갈 것입니다.
이에 오늘은 [장자십사독] <덕충부4-1>을 쓰고(소개글),
다음 주 금요일에는 <덕충부4-2>(장자의 글귀에 대한 저의 소감문)를 올리고자 합니다.

* 참고 사항 *
장자의 논법은 크게 세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우언(寓言)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중언(重言)이라 하며,
마지막 하나는 치언('치'자 코드가 없네요..)이라고 합니다.
우언은 이솝우화처럼 비유로서 이야기하는 어법이고,
중언은 공자처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그 권위를 확실히 인정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역으로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낸 어법입니다.
치언은... 나중에 직접 보시게 될 것입니다. ^^
아무튼 그렇다면, 아래의 글은 장자의 어법 중 중언에 해당되겠지요.


2004년 1월 16일 秋水


<장자의 이야기(텍스트 p175-177): 감산의 장자풀이, 서광사.>

노나라에 발뒤꿈치가 잘린 숙산무지라는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중니를 찾아갔다. 중니가 말했다.
"자네는 전에 함부로 굴다가 죄를 저질러 불구자가 된 걸세. 이제 나를 찾아왔지만 이미 늦었네."
이에 숙산무지가 말했다.
"저는 도를 힘써 배우지 않은 채 몸을 가볍게 놀린 까닭에 발뒤꿈치를 잘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온 것은 발보다 귀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를 온전하게 하려 합니다. 하늘은 만물을 골고루 덮어주고 땅은 만물을 빠짐없이 안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하늘 같고 땅 같은 분으로 존경했는데, 선생님께서 제가 불구자라고 이처럼 홀대하실 줄 어떻게 알기나 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내가 고루했네. 여보게, 왜 들어오지 않는가. 자네가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게나."
그러나 무지가 그냥 가버리자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네들도 힘써 배우게나. 무지는 불구자인데도 한 생각으로 수양해 이전의 과오를 씻어냈다네. 하물며 육신이 멀쩡한 자네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어느 날 무지는 노담을 만나 말했다.
"공구(孔邱)가 지인(至人)의 경계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더군요. 그런데도 그는 어찌하여 자꾸만 제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까? 그는 허황된 명성을 얻으려 하지만, 지인은 이를 질곡으로 여기는 줄 모르는 모양이지요."
노담이 말했다.
"왜 중니에게 생사는 하나이고 옳고 그름도 하나라고 일러 주어 그의 얽매임을 풀어 주지 않았는가?"
이에 무지가 대답했다.
"하늘이 내린 형벌인데 어찌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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